모두가 선망하는 에르메스의 주황
명품이라고 하면 평소에 경험하지 못하는 특별함과 고결함, 그리고 유서 깊은 역사와 명성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높은 품질과 함께 살인적인 가격도 따라온다. 갖고 싶지만 제일 먼저 비싼 가격부터 생각나니 말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명품은 여전히 사치품으로 여겨지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그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는 것 같다. 라인업을 확장하고 대중적으로 다가가는 명품 브랜드와, 그래도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인식이 만나 어딜 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감히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브랜드가 있는데, 바로 캘리백과 버킨백으로 유명한 에르메스다. 철저한 가족경영을 기반으로 한 품질관리와 장인정신, 그리고 지극히 한정된 수량만 생산하는 전략 덕분에 명품 3대장 '에루샤' 중에서도 정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색은 낭만적인 주황색이다. 지나가다 주황색 쇼퍼백이나 종이박스만 봐도 설레는 마음과 함께 에르메스를 떠올리게 된다. 모두가 선망하는 주황색은 희망과 활력, 따뜻함과 건강함을 연상시킨다. 가시적으로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고, 심리적으로는 행복감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과 여러 상징체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름조차 없던 색
하지만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현재의 주황도 과거에는 흔히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색이었다. 고대 인류에게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파랑처럼 주황색도 천년동안 이름조차 없었다. 선조들의 환경과 인식에 없었던 파랑색과 달리, 주황은 우리 주변에 항상 있어 왔으며, 꽃이나 열매, 동물, 채소, 일몰 직전의 하늘에서 함께 존재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강과 노랑의 특성을 동시에 갖고 있던 주황색이 주황 그 자체로 돋보일 수 있는 자리는 매우 좁았을 것이다. 자칫 조금만 밝으면 노랑이 되고, 짙어지면 빨강, 어두워지면 갈색이 되기 때문이다. 무지개 속에서 항상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그 좁은 자리 속에서도 주황은 충분히 화려하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것이 주황의 존재방식이었다.
주황색의 주인, 구피
우리가 주황색을 '주황'이라고 이름 붙이기 전까지는 이 작은 물고기가 주황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구피는 전 세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데, 집에서 가장 많이 키우는 열대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키우는 애완용 구피는 종류가 천차만별이지만, 자연산 구피는 기후와 지역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바로 수컷 구피의 몸에 주황색 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수컷 구피가 주황색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체내에 빨간색을 만들 수 있는 '드러소프테린'이라는 색소와 체외에 노랑과 주황을 띄는 '카로티노이드'라는 색소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색소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색조의 주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색소들을 잘 조화시켜서 암컷 구피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주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목표인 번식을 하기 위해 수컷 구피는 암컷 취향에 맞는 궁극의 주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물속의 해조류와 플랑크톤의 함유량에 따라 만들 수 있는 주황의 색조도 달라지고, 암컷 구피의 취향도 달라지기 때문에 수컷 구피는 주황색 장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 다양한 주황을 만들 수 있는 수컷 구피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암컷 구피의 색각 능력, 즉 색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수많은 종류의 주황색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그 모든 종류의 주황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 실제로 암컷 구피는 색을 감지하는 광수용체를 4개를 가지고 있고, 자외선에 반응하는 광수용체까지 합치면 총 11개를 가지고 있다. 3개의 광수용체로 색을 인식하는 인간에 비하면 훨씬 더 많고 디테일하게 색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로 소통하고 살아가듯이, 구피는 주황색이 곧 언어이고 주황색으로 소통하며 살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 사프란
우리가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 고대 동굴벽화에는 주황색 색소를 얻기 위해 사프란을 따는 여인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프란은 크로커스의 일종으로 가운데 덩굴처럼 생긴 암술머리가 사프란의 원료가 된다. 사프란을 얻는 과정은 굉장히 까다로운데, 태양 빛에 닿으면 꽃이 사그라들면서 암술머리가 시들기 때문에 해가 뜨기 전 서늘한 꼭두새벽에 조심스럽게 따야 한다. 크로커스 꽃에는 암술머리가 겨우 3개밖에 들어있지 않는데 약 500그램의 사프란을 얻으려면 5만 개의 암술머리가 필요하다. 거기에 이 정도 양의 꽃을 심으려면 축구장 크기의 넓은 땅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프란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가 되었다. 비싼 주황색은 에르메스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렌지의 여행
번역기에 주황색을 넣으면 'Orange'가 나온다. 이 향기롭고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뿜어내는 과일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오렌지라는 이름이 생겼다. 과일 자체가 색깔이 된 것이다. 오렌지라는 말의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중국에서 최초로 재배되어 이후에 실크로드를 따라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되어있다. 페르시아를 거쳐 스페인에 당도할 때까지 그 지역의 발음에 따라 나랑, 나란지, 나랑가, 나랑하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에서 '오랑주'로 발음되었고 서서히 오렌지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오렌지라는 단어가 널리 보급되었던 16세기에 들어와서 색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오렌지라는 과일은 누가 봐도 정말 주황색이다.
주황색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
주황색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라고 한다면 단연 네덜란드일 것이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항상 주황색이 들어가 있다. 종종 우리나라를 백의민족이라 부르는 것처럼 네덜란드는 오렌지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오렌지색에 진심인 이유는 1544년 오렌지라는 작위를 물려받은 '오렌지공 윌리엄 1세'라는 왕으로부터 시작한다. 윌리엄1세는 당시 스페인의 지배에 맞서 네덜란드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달성했다. 물론 윌리엄도 기독교인에 대한 처우에 분개하여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운 이유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네덜란드는 완전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스페인에 대항해 싸운 네덜란드의 국부의 이름을 딴 '오렌지 색'이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컬러가 되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윌리엄 1세의 증손자 오렌지공 윌리엄 3세도 비슷한 일을 했다는 것이다. 윌리엄 3세는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 되었다. 더불어 이전의 왕이었던 제임스2세를 격퇴하면서 현재 영국섬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때에도 역시 승리를 이끌었던 윌리엄 3세를 기려 주황색은 아일랜드의 왕당파의 색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반대파였던 공화파는 훗날 초록색을 자신들의 색으로 채택했다. 아일랜드의 국기는 왕당파의 주황색, 공화파의 초록색, 그 가운데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흰색이 자리 잡고 있다.
안전을 알리는 주황
오늘날의 주황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색들 중에서 가장 밝고 채도가 강한 색은 노란색이다. 하지만 해가 뜨고 지는 특정 시간대까지 모두 고려하면 주황색이 가장 시선을 강탈하는 색이 된다. 특히 강이나 바다와 같은 푸른 계열, 혹은 하늘이나 얼음과 같은 밝은 색의 배경들이 더해졌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명조끼나 구명보트, 응급 장비에 가장 많이 사용된다. 새벽이나 일몰시간처럼 특수한 상황에서도 풍부한 자외선을 뚫고 우리 눈으로 들어온다. 우리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할 때를 대비해 건설용 교통 표지판이나 죄수복, 교통 경찰이 걸치는 조끼에 주황색이 사용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도 안개가 자주끼는 해협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극한 날씨에서도 다리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주황색으로 도장한 것이다.
색은 진정 본질적인 것일까?
우리가 어떤 색을 선택하고 사용하는 것에는 반드시 어떤 의도가 있다. 삼성이 기술 혁신과 신뢰를 주기 위해 파란색을 사용하고, 레드불은 열정과 에너지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빨간색을 사용했다. 기업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자리에 갈 때 입을 옷을 정하거나, 새로 이사한 집의 가구 톤을 정할 때, 심지어 휴대폰 케이스를 바꾸더라도 우리는 의외로 신중하게 색을 고민한다. 내가 사용하는 색에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컬러를 올바르게 선택하는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에 이야기 했던 에르메스의 주황색 박스를 볼 때면 낭만을 가득 품은 럭셔리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선망하는 사람들의 욕망도 보인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그들을 상징하는 주황색을 어떤 의도를 갖고 선택하지 않았다. 과거 에르메스의 포장은 항상 크림색에 금색 띠가 둘러져 있었는데 세계2차대전이 터지면서 물자부족으로 크림색 포장지의 수급이 어려워졌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서도 여전히 물자 수급이 어려워지자 결국 아무도 원하지 않는 색깔인 오렌지색이 유일한 선택지로 남았었다. 포장 때문에 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오렌지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어떠한 의도없이 선택된 오렌지에 에르메스의 우아함과 활기가 깃들어 있다. 원래 오렌지색에 없던 의미를 불어넣은 것이다. 우리가 색깔을 고를 때 거기에 묻어있는 의미도 같이 고른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 가치관을 오랜시간 묻혀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색깔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색칠놀이가 재밌나보다.
'Vitgrimza > 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의 살인자, 초록 (1) | 2024.03.20 |
---|---|
영원히 맑고 순수하라, 파랑의 역사 (1) | 2024.02.24 |
애플은 왜 실버를 선택했을까? (1) | 2024.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