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은 불과 같이 인간의 기초적인 필요를 나타낸다.
불과 물, 천연자원은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다.
자신을 색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거짓말쟁이일 것이다. 진정한 색 전문가라면 물리학, 화학, 천문학, 광학, 신경과학, 지질학, 식물학, 동물학, 인간 생물학, 언어학, 사회학, 인류학, 미술사, 지도 제작 등 다양한 학문에 능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여행길에서 배웠던 가장 중요한 것은 색이 우리 삶에 왜 그토록 편재해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모든 두뇌활동의 80% 이상이 눈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처리하는 외부 세계의 정보 대다수가 시각적인 것이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는 모두 색이 있다.
-컬러, 그 비밀스러운 언어
1. 왜 시작했을까
대학생 시절 나의 전공은 컬러, 그리고 색채학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2학년 1학기가 끝나고, 그다음에 있을 2학년 2학기와 3학년 전공과목을 더 전략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여름 방학 계절학기를 듣기로 했다. 계절학기를 미리 들어놓으면 그다음 학기에 교양과목을 듣지 않아도 되니 전공과목에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고 더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 들었던 계절학기는 산학 협력 업체와 2k로 제작된 컨텐츠를 4k로 업스케일링 하는 것이었다. 그때 다빈치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했는데 다빈치는 원래 영상의 색감을 조정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2k 클립을 4k로 늘린 후 그때 만들어지는 노이즈를 없애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자연스레 Color Grading과 DI과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내 전공인 편집과는 아예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름 방학 동안에 이 프로그램을 잘 다루고 싶었고 마우스로 색과 대비를 휙휙 돌려가며 조금씩 연습해 나갔다. 왠지 모르게 이걸 더 빠르게 배우려면 색깔에 대한 공부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 일과가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색채학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만 더 나가면 세종 국립도서관이 있었는데 책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도서관 문이 닫을 때까지 거기 앉아 있었다. 이러한 생활은 계절학기가 끝나고 2학년 2학기에도 계속되었으며, 2학년 겨울방학 때에는 그 도서관에서 근로학생으로 일하기까지 했다.
이때 내 눈에 보이는 색은 물리학의 일부인 광학과 전자기학, 더 나아가 천문학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빛은 결국 우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빛이 물체에 닿으면 흡수와 반사가 동시에 일어나며, 반사된 그것이 각막을 뚫고 망막에 닿는 순간 화학적 반응이 생겨 우리가 색을 보고 인식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형성된다. 색을 '보는 것' 다음으로 색을 '알게 되었을 때' 머릿속에는 논리와 감정이 일어난다. 이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심리적 변화를 만들고 곧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이때까지만 해도 색을 공부하며 만들어진 작은 감정들이 이토록 가슴 뛰게 할 줄 몰랐고, 컬러가 내 삶에서 엄청나게 중요해질 것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2. 무슨 생각으로 할까
색에 대해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집어 들었던 책은 '컬러, 그 비밀스러운 언어' 였는데 9년이 지난 지금도 내 작업실에 고이 모셔두었으며 가끔씩 펼쳐서 다시 읽어본다. 컬러리스트가 어떤 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밝기가 필요하고, 그다음에 방향과 농도를 조정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색을 만들기 훨씬 이전에 그 색을 만들어야만 하는 동기와 이유가 있어야 한다. 동기가 있을 때 그 색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며 그 이유를 더 확실하게 해 줄 보조색도 배합되기 때문이다. 이유 있는 컨셉을 만들었으면 그다음 단계는 이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이 받아들일만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다. 마술을 보는 관객들에게 프레스티지를 선사하듯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색을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 여기에는 어떤 영혼이 깃들게 된다. 이러한 컬러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는 전부 색채학과 이 한 권의 책에서 오랫동안 쌓여 만들어진 것 같다.
3. 예술과 기술에는 간극이 있다
컬러를 만들 때에는 감각과 상상이 필요한데 이는 분명히 예술의 영역이 맞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의미를 불어넣고 허공에 이미 되어있는 모습을 수도없이 생각하는데 거의 모든 예술 활동이 이 과정을 거치니까. 하지만 이걸 눈앞에 꺼내놓는 일은 온전히 기술적인 것이다. 이때에는 실무적 능력과 경험이 필요하고, 끊임없는 연습으로 체득할 수 있다. 당연히 나도 색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해서 단숨에 색깔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다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회사에서 실무적인 가르침을 받았고 처음 몇 년 동안은 모니터 앞에서 허우적 대기만 했다. 나에게 색을 알려주신 분은 메인 스트림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컬러리스트였는데 그 때문에 나도 아주 살인적인 스케줄을 함께 소화하며 알게 모르게 그 기술들이 전해온 것 같다. 이미지를 고민하는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예술과 기술 두 개의 바퀴를 함께 굴리며 나아간다. 그런데 예술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표현하려 기술을 찾아 나서게 되고, 기술을 가진 사람은 더 숭고한 것을 원해 예술을 탐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만드는 컬러는 그 예술과 기술 간극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4. 물리학, 화학, 생물학, 그리고 색채학
실무의 뿌리는 이론이고 나에게는 색채학이 이론이 되었다. 그 전에 모든 색은 빛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광학과 전자기학부터 알아야 했다. 우주의 거의 모든 곳에는 전자기파라고 하는 에너지가 있는데 이들의 떨림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파장으로 나뉘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시광선이라 불리는 특정 영역의 파장이 외부 세계에 닿고 튕겨져 나온 것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된다. 앞서 말했듯 여기서부터 화학과 생물학으로 넘어간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눈은 빛을 어떻게 인식하고 눈 안에서 색이 어떻게 합성되고 분해되는지에 대해 공부한다. 더 나아가 시세포가 색으로 합성되는 근거는 무엇이며, 인류가 왜 이렇게 진화하게 되었는지까지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모든 영상 기술을 이해하고 활용하는데 어마어마한 도움이 된다. 우리 눈을 본떠 만든 카메라에서 파생된 모든 기술과 기법들이 눈이 작동하는 원리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결국 색을 만든다는 것은 색을 섞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두가지 이상의 색을 섞었을 때 어떤 색이 나오는지 알아야 하며, 반대로 색을 밝기로부터 분리하려면 어떤 색을 덜어내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이 주황색이 되려면 노란색을 섞어야 하고, 그 주황색이 무채색이 되려면 청록색을 섞어 색을 빼야 한다. 물론 감색과 가색의 영역, 컬러 모델과 컬러 사이언스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색채학 속에는 색을 만드는 방법이 수학 공식처럼 이미 다 나와있다. 그래서 색 배합을 암기해 두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고, 더 좋은 건 실제로 물감을 섞어보는 것이다. 다빈치나 포토샵으로 실험해도 즉각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물감은 한번 섞으면 되돌리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조색을 할 때마다 신중해지고 이 경험이 평생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5. 디지털
필름은 아날로그와 함께 사라졌고, 안타깝게도 나는 필름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필름에서 느껴지는 그 느낌을 원했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지금의 디지털이 눈보다 더 선명한 카메라를 만들어 냈음에도, 시대를 거슬러 필름 감성을 원하는 것이 디지털을 더 깊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예전에 디지털은 영상 이미지를 다루려면 당연히 알아야 두어야 하는 개념이었다. 지금은 내가 만지는 기계들을 어떻게 거슬러야 그 느낌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 해야 하는 수단이 되었다. 정말 이상한 생각인 것 같지만 알렉사를 만들어 낸 아리를 필두로 모든 카메라 회사들이 다 함께 가고 있는 길이다.
6. 궁극의 언어
만약 같은 문화와 통념을 공유하는 사회라면 컬러보다 더 원초적인 언어가 있을까? 그 어떤 말과 글, 그림보다 빨간색 하나로 위험과 적의를 가득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주황은 기쁨과 희망을, 파랑은 우울과 슬픈 감정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범세계적으로 이미 약속되어 있다. 그래서 대비와 색조가 감정을 만든다는 것은 절대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색이 너무 많은 의미와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고르고 만든 색을 명확하게 알리고 설명해 주어야한다. 더 나아가서 그 색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설득하기도 한다. 그래서 컬러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지 생각하는 데 보낸다. 이 색은 어떤 느낌을 주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이유로 만들었는지 다시 고민하다 보면 더 명쾌해지기도 하고 빈틈을 발견해 다시 수정하기도 한다. 내가 만든 것을 남들에게 자신있게 소개하는 것은 정말로 뜻깊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컬러를 설명할 때만큼은 한 편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듯 의미와 정서를 담아 신중하게 준비하게 된다.